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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안이씨(咸安李氏)의 뿌리

 

함안(파산)(咸安)(巴山) 이씨(李氏)는 어디서 왔는가?  함안이씨(咸安李氏)의 뿌리는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우리들은 우리의 뼈와 피에 대한 가장 원초적(原初的)인 궁금증을 제기(提起)한다. 우리들의 집안에 전(傳)해 내려오는 족보(族譜)와 사료(史料)들에 의하면 함안이씨(咸安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고종(高麗高宗): 23代, 1213.8.∼1259.6).) 때에 큰 공(功)을 세운 상(尙)할아버지시다. 상(尙)할아버지는 광록대부(光祿大夫): 고려(高麗) 문산계(文散階)의 관계(官階)의 하나, 종삼품(從三品). 공민왕(恭愍王)때는 정이품(正二品)의 상(上))를 지내셨고 파산군(巴山君)에 봉(封)해졌다. 파산(巴山)은 지명(地名)으로 오늘날의 함안군명(咸安郡名)이다. 상(尙)할아버지는 함안(咸安)에 사셨기 때문에 고려(高麗) 고종(高宗)이 그의 공(功)을 기려 파산군(巴山君)으로 봉(封)했던 것이다 고려(高麗) 고종(高宗)때는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가 이루 말 할 수 없이 혼란에 빠져 있었다.

  

군사(軍事)쿠데타로 정권(政權)을 잡은 최충헌(崔忠獻)이 정치(政治)를 제멋대로 해서 왕권(王權)은 땅에 떨어지고 백성(百姓)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도처(到處)에서 민란(民亂): 농민폭동, 노비폭동(奴婢暴動)(만적(萬積)의 난등))이 연달아 일어나고 심지어 경주(慶州)의 별초군(別抄軍)도 반란(反亂)을 일으킬 정도였다. 나라꼴이 이 지경이 되니 외세(外勢)인들 가만히 있지 않았다 몽고(蒙古)는 1231년(年): 고종(高宗) 18))에 일차(一次) 침입을 시작으로 2차(次), 3차(次), 4차(次)까지 쳐들어온다. 왜(倭) 또한 침입에 앞서서 이 당시의 고려(高麗)를 괴롭히고 있었다.

 

나라가 이지경이 되어 있을 때 상(尙)할아버지는 큰 공(功)을 세웠던 것이다. 그 구체적인 업적을 기록(記錄)에서 찾을 길이 없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상(尙)할아버지 이전(以前)에는 멀리 위위시(衛尉寺): 고려(高麗) 때 의장(儀仗)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官廳))에서 주부동정(主簿同正): 국가의 기밀·법의 개정·관작수여 등의 일을 맡아보던 중요한 직위, 종이품(從二品))을 지내시던 휘원서(諱元敍)로부터 시작(始作)되어 휘탕취(諱湯就), 휘광주(諱光柱), 휘용기(諱龍起)로 이어지다가 상(尙)할아버지에 이르렀다는 설(說)이 있으나 이 부분(部分)은 기록(記錄)이 없어 알 도리(道理)가 없다.

 

아무튼 상(尙)할아버지 그 무렵 대대(代)까지 아마 대대로 파산(巴山) 땅에서 사셨던 것 같다. 파산(巴山)은 원래 아라가야(阿羅伽倻)다 아라가야는 육가야(六伽倻): 1세기경(世紀頃)∼6세기(世紀)) 중의 중요(重要)한 하나로 당시(當時)의 가야문화(伽倻文化)는 지금에 와서 더욱 그 실체(實體)가 중요시 되고 있다 신라(新羅) 23代 진흥왕(眞興王): 562年))때 신라에 흡수(吸收)되고 말았다. 함안이씨(咸安李氏)의 원조(遠祖)들은 아마도 가야인(伽倻人)이었을 가능성(可能性)이 크다.

 

역사(歷史)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朝鮮)에서 고려기(高麗期)로, 고려(高麗)에서 다시 통일신라(統一新羅)로 고대삼국(古代三國)과 가야(伽倻)로 아득한 그 옛날을 우리는 머리에 그리게 된다. 함안이씨(咸安李氏)의 조상(祖上)은 어디서 왔을까?  아득한 그 옛날 우랄알타이 산맥(山脈)에서 몽고초원(蒙古草原)으로, 몽고(蒙古)에서 만주(滿洲)로, 만주(滿洲)에서 다시 한반도(韓半島)로 내려와서 낙동강(洛東江) 구비구비 흐르는 들판에 터전을 잡고, 햇볕 따스한 야산(野山) 밑에 보금자리를 잡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득한 옛날을 생각해 보면 결국 함안이씨(咸安李氏)의 조상(祖上)은 한민족(韓民族)의 큰물줄기 속에 그 뿌리가 박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우리는 시조(始祖)를 상(尙)할아버지로 삼는다 정확한 기록(記錄)으로 우리가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정도(程度) 역사(歷史)를 거슬러 올라간 시점(時點)이다. 800년의 가문(家門)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집안도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특히 세계적(世界的)으로 보면 이것은 대단하고 놀라운 일이다 세계(世界)의 수많은 민족(民族)들 중에 그 속에서도 자기(自己) 가문(家門)의 역사(歷史)를 몇 백년(百年)씩이나 거슬러 올라갈 때까지 알고 있는 가문(家門)은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2. 함안이씨(咸安李氏)의 발자취

 

상(尙)할아버지는 아들 두 분을 두셨다. 형(兄)되시는 분이 청(淸)이신데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정이품(正二品))인 판서(判書)를 지내셨고, 아우는 원(源)이신데 판도사판서(版圖司判書)를 지내다. 판도사(版圖司)는 호조(戶曹)를 가리키며 육조(六曹)중의 하나이다. 판서(判書)는 으뜸 벼슬로 지금으로 치면 재무부장관(財務部長官)쯤을 지내신 셈이다. 청(淸)께서는 아들 홍(弘)을 두셨다. 홍(弘)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셨다 이 벼슬은 종일품(從一品)의 높은 직위(職位)이다.

 

그리고 원(源)께서는 아들 방실(芳實)을 두셨다 방실(芳實)은 홍(弘)과 사촌간(四寸間)이다. 다 같이 상(尙)할아버지의 손자(孫子)들이다. 방실(芳實)은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때 여러차례에 큰 공(功)을 세운 상장군(上將軍)이셨다 특히 홍건적(紅巾賊) 이십만(二十萬) 대군(大軍)을 물리친 공(功)은 고려조(高麗朝)를 누란(累卵)의 위기(危機)에서 구(救)했던 것이다.

 

이때의 고려(高麗) 삼원수(三元帥)는 방실(芳實)할아버지를 비롯해서 안우(安祐), 김득배(金得培) 세분이었다. 이때 홍건적을 물리친 방실(芳實)할아버지의 공(功)은 고구려(高句麗) 영양왕(瓔陽王) 때 수(隨)나라의 백만대군(百萬大軍)을 물리친 을지문덕(乙支文德)장군이나, 조선조(朝鮮朝) 선조(宣祖)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을 평정(平定)한 이순신(李舜臣)장군의 업적(業績)에 버금가는 큰 공(功)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방실(李芳實)장군은 교과서(敎科書)에도 실려 있다.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은 세자(世子) 때 원(元)나라로 볼모로 잡혀가 있었고, 왕(王)이 되어 고려(高麗)로 돌아왔을 때는 원(元)으로부터 자률(自律)과 독립(獨立)을 찾겠다는 결심(決心)에 차 있었다. 이때 방실장군(芳實將軍) 등(等) 지장(智將)을 거느리고 젊은 정몽주(鄭夢周) 등(等) 신진(新進)을 모아 국력(國力)을 쌓아가고 있었다. 방실(芳實)할아버지는 용감(勇敢)한 장군(將軍)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공민왕(恭愍王) 9년(年):1360년)) 3月에는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이 되고,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임명(任命)되셨다. 추밀원(樞密院)은 국왕(國王)의 명령(命令)이나 결재를 중개하고 궁중(宮中)의 경비(警備)를 맡아보던 기관(機關)이다. 말하자면 임금의 비서실(秘書室)과 경호실(警護室)을 합친 기관(機關)이 추밀원(樞密院)이다.

 

그러니까 방실(芳實)할아버지는 일선(一線)에서 전투(戰鬪)를 지휘하는 장군(將軍)뿐이 아니고, 나라의 중추부(中樞部)에 계셨던 분이시다 아무튼 방실(芳實)할아버지는 여러 많은 공(功)으로 왕(王)으로부터 옥대(玉帶), 옥영(玉纓)을 하사(下賜)받으시고, 벼슬은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행중서평장정사(行中書平章政事) 상장군(上將軍) 원수(元帥)이시다.

 

그러나 방실(芳實)할아버지는 그의 공(功)을 시샘한 간신(奸臣) 김용(金鏞)의 모함(謀陷)으로 살해(殺害)되고 만다 왕(王)의 부름을 받고 전장(戰場)에서 돌아오던 중 김용(金鏞)의 심복(心腹)인 자객(刺客) 박춘(朴椿) 등(等)에 의해서였다. 그 후(後) 충렬(忠烈)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따라서 교과서에는 “충열공 이방실 장군(忠烈公 李芳實 將軍)"으로 나온다.

 

이때 고려(高麗) 삼원수(三元帥)가 다같이 김용(金鏞)의 간계(奸計)에 의해서 피살(被殺)되는데 이 원통한 참사(慘事)를 보고 비분강개(悲憤慷慨)한 분이 청년(靑年) 직한림(直翰林) 정몽주(鄭夢周)였다 정몽주(鄭夢周)는 왕(王)에게 간청하여 삼원수(三元帥)의 시신(屍身)을 수습(收拾)하여 장사(葬事)지냈다 이때의 제문(祭文)은 오늘에 전(傳)하나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김용(金鏞)은 結局 왕궁(王宮)까지 범(犯)하려다가 실패(失敗)하니 공민왕(恭愍王) 12년(年): 1363년)) 4월(月)에 처형(處刑)되었다.

 

다시 1세(世) 시조(始祖) 상(尙)할아버지로 돌아간다. 큰아들 2세(世) 청(淸), 3세(世) 홍(弘), 4세(世) 자수(滋秀): 호군(護軍)), 5세(世) 운길(云吉)로 이어진다. 운길(云吉)할아버지가 활동(活動)하시던 시대(時代)는 고려왕조(高麗王朝)도 이미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특히 왜구의 침입(侵入)은 해를 거듭할수록 심해져서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때 운길(云吉)할아버지도 왜구토벌(倭寇討伐)에 출정(出征)하셨고 격전(激戰) 끝에 분사(憤死)하고 마셨다 돌아가신 후(後)에 숭록대부(崇祿大夫): 종일품(從一品))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追贈)되셨다.

 

6세(世) 즐(隲)할아버지는 우왕(禑王) 3년(年): 1377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18세(歲)에 문과(文科) 회시(會試)에 일등(一等), 전시(殿試)에서는 육등(六等)으로 양과(兩科)에 급제(及第)하셨다. 대구현령(大邱縣令): 종오품(從五品))을 지내셨고, 청백리(淸白吏)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정삼품(正三品))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추증(追贈)되었다. 7세(世) 생원(生員) 원로(元老)할아버지를 거쳐 8세(世) 미(美)할아버지에 이른다. 이때는 이미 고려(高麗) 왕조(王朝)가 무너지고 조선왕조(朝鮮王朝)로 세상(世上)은 바뀌었다.

 

미(美)할아버지는 생원(生員)으로 단종(端宗) 1년(年): 1453년)에 문과(文科):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에 급제(及第)하고 진해현감(鎭海縣監)을 지내셨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정삼품(正三品))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유일(唯一)한 국립대학(國立大學)의 총장격(總長格))으로 지내신 분이다. 미(美)할아버지는 당시(當時) 조선조(朝鮮朝)의 통치이념(統治理念)이였던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였으며, 전국(全國) 사림(士林)중에서 수재(秀才)들을 뽑아 성균관(成均館)에 모아놓고 나라의 인재(人材)를 양성(養成)했었다. 미(美)할아버지의 호(號)는 창강(滄江)이고 시호(諡號)는 사간(思簡)이다. 미(美)할아버지는 전국(全國)의 인재(人材)뿐만 아니라 자기(自己)의 아들들도 참으로 훌륭하게 키우셨다. 아들이 네 분인데 큰아들부터 이름 이 인형(仁亨), 의형(義亨), 예형(禮亨), 지형(智亨)이시다.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참으로 좋은 이름이시다. 이 네 분 형제분(兄弟分)은 9세(世)이다.

 

인형(仁亨): 호(號) 매헌(梅軒))할아버지는 1468년(세조(世祖)14)에 문과(文科): 춘장시갑과(春場試甲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시고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종이품(從二品))을 지내시고, 또한 한성부우(漢城府右)·좌윤(左尹): 종이품(從二品))을 역임(歷任)하셨다 사헌부(司憲府)는 백관(百官), 즉 모든 관리(官吏)들을 감찰(監察)하고 기강(紀綱)을 바로잡으며, 정책수행(政策遂行)이 올바로 진행(進行)되고 있는가를 피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사헌부(司憲府)는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과 더불어 이른바 언론삼사(言論三司) 중의 하나이다. 이 삼사(三司)의 관원(官員)들을 언관(言官)이라고 하여 이들은 다른 일반관료(一般官僚)들과는 다른 직책(職責)을 맡아 있었다.

 

이들 삼사(三司)의 언관(言官)들은 그들의 직책상(職責上) 나라의 모든 중요한 정책(政策)이나 인사문제(人事問題) 등에 대해서 일일이 논평(論評)하는 일을 해야만 했다. 오늘날의 사회(社會), 정치평론(政治評論)과 같은 일을 했는데, 그 대상은 임금의 잘잘못 까지가 논평(論評)대상이었다 따라서 사헌부(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 그리고 홍문관(弘文館)의 관원(官員)이 되는 사람은 사림(士林) 중에서도 그 학문(學問)이 뛰어나고 강직(强直)한 성품을 가진 젊은 수재(秀才)라야 했다.

 

인형(仁亨)할아버지는 그러한 사헌부(司憲府)의 장(長)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감사원장(監査院長) 격(格)이였다. 인형(仁亨)할아버지가 벼슬길에 올랐던 것은 세조(世祖) 때의 일이나, 주로 활동하시던 시기(時期)는 성종(成宗)때부터 연산군대(燕山君代)에 이르는 시기이다. 성종(成宗)께서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을 본 받아서 문치(文治)에 주력(主力)하고 세조대(世祖代)에서 거세(去勢)되었던 관원(官員)들이나, 사림(士林)들을 중용(重用)하여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이룩하는데 노력(努力)하였다.

 

그러나 성종(成宗) 다음에 들어선 연산군(燕山君): 1495.12.∼1506.7.))은 역사(歷史)에 기록된 폭군(暴君)이였다 연산군(燕山君)은 저 유명(有名)한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킨 장본인(張本人)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는 한마디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을 핵심(核心)으로 한 신진사류(新進士類)인 사림파(士林派)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中心)으로 한 기성사류(旣成士類)인 집권세력(執權勢力)인 훈구파(勳舊派)에게 숙청(肅淸)당한 사건(事件)이다.

 

성종(成宗)임금은 사림(士林): 당시(當時)의 지성인(知性人)들))을 키워야 왕도정치(王道政治)가 이룩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언론삼사(言論三司)를 중심(中心)으로 우수(優秀)한 사림(士林)을 배치(配置)했던 것인데, 그러다 보니 성리학(性理學)의 정통(正統)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이 중심(中心)이 되어 사림파(士林派)가 형성(形成)되기에 이르렀다. 파(派)가 형성(形成)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세력화(勢力化)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사림파(士林派)는 주로 영남(嶺南)과 기호(畿湖) 출신(出身)의 양반(兩班), 토호(土豪) 자제(子弟)들로서, 그들은 말하자면 지방(地方)의 중산층(中産層) 출신(出身)들이었다. 특히 그들은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理念)인 성리학(性理學)을 철저히 신봉(信奉)함으로써 그들의 이념(理念)을 현실화(現實化)하는데 온 정성(精誠)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시(當時)의 집권세력(執權勢力) 속에는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世祖)가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죽이고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는 과정에 빌붙었던 자(者)들이 섞여 있었다 말하자면 훈구집권세력(勳舊執權勢力)들은 사리사욕(私利私慾)과 기득권(旣得權)만을 움켜쥐고 보수(保守)와 안이(安易)에 안주(安住)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이념(理念)에 불타는 사림파(士林派)들은 훈구집권세력(勳舊執權勢力)의 무위무능(無爲無能)과 비리(非理)를 비판(批判)하고 정책(政策)과 제도(制度)를 혁파(革罷)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훈구집권세력(勳舊執權勢力)들은 논리(論理)에 있어서나 명분(名分)에 있어서 항상 사림파(士林派)에 밀리고 있었다.

 

그들의 사림파(士林派)에 대한 울분(鬱憤)과 적개심은 날이 갈수록 쌓여만 갔다. 이러던 차에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發見)된 것이다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중국(中國)의 항우(項羽)가 초(楚)나라의 회왕(懷王)을 죽이고 자기(自己)가 왕위(王位)에 오른 고사(故事)에 빗대어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죽이고 자기(自己)가 왕위(王位)에 오른 것을 꾸짖은 명문(名文)이었다.

 

사초(史草)에서 이것을 발견(發見)한 유자광(柳子光) 일단(一團)은 이것을 구실로 삼아, 연산군(燕山君)을 충동(衝動)질 해서 사림파(士林派)를 일거에 숙청했던 것이다. 이때 김종직(金宗直)은 이미 고인(故人)이었으나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다. 수많은 사림(士林)이 처형(處刑)되고 귀양 갔으며 자리에서 쫓겨났다 연산군(燕山君)이 왕위(王位)에 오른지 불과 이년(二年) 팔개월(八個月): 1498년(年) 7월)만의 일이다.

 

이러한 숙청(肅淸)의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인형(仁亨)할아버지는 사화(士禍)의 부당(不當)함을 직간(直諫)하는 상소문(上疏文)을 올리고 박해(迫害)를 받다가 끝내는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年) 10월(月))때 부관참시(剖棺斬屍)의 극형(極刑)을 당(當)한다 사화(士禍)는 인형(仁亨)할아버지 한 분에게만 미친 것이 아니라 온 집안에 한파(寒波)를 몰고 왔다 그러한 것은 당연(當然)(唐硯)히 각오(覺悟)한 기개(氣槪)였던 것이다.

 

연산군(燕山君)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킨 지 삼년(三年)을 지탱 못하고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年) 9월(月))으로 물러나고 만다 중종(中宗)은 다시 사림파(士林派)를 수습(收拾) 보호(保護)하게 되니 이때 1507년(年): 중종(中宗) 2))에 인형(仁亨)할아버지는 신원(伸寃) 즉 명예(名譽) 회복(回復)이 이루어 진다. 그리하여 1508년(年): 중종(中宗) 3)) 6월(月) 11일(日)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추증(追贈)되고 다시 예조판서(禮曹判書)로 높은 벼슬을 받았다.

 

사형제(四兄弟)중 둘째인 의형(義亨)할아버지는 1477년(年): 성종(成宗) 8)) 문과(文科): 춘장시병과(春場試丙科))에 급제(及第)하고 경상도(慶尙道) 암행어사(暗行御史)를 거쳐서 1482년(年): 성종(成宗) 13) 6월(月)13일(日)) 통훈대부(通訓大夫): 정삼품(正三品))로 승급(昇級)하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과 집의(執義)를 거쳐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내셨다. 의형(義亨)할아버지는 자(字)는 용부(勇夫)며, 호(號)는 행헌(杏軒)이시다. 역시 전형적(典型的)인 사림(士林)이셨다. 사헌부(司憲府) 언관(言官)에 암행어사(暗行御史) 출신(出身)이다.

 

셋째인 예형(禮亨)할아버지는 1480년(年): 성종(成宗) 11))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와 1486년(年): 성종(成宗) 17)) 중시(重試) 병과(丙科) 양과(兩科)에 급제(及第)하고 예조좌랑(禮曹佐郞)과 목사(牧使): 정삼품(正三品)의 벼슬로 전국팔도(全國八道)에 두었던 지방관청의 으뜸 벼슬))를 지내셨다 역시 전형적(典型的)인 사림(士林)으로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기록(記錄)되었다. 예형(禮亨)할아버지의 호(號)는 오헌(梧軒)이시다.

 

넷째인 지형(智亨)할아버지도 기개(氣槪)가 대단한 분이셨다. 1477年 성종(成宗)8)에 문과(文科): 춘장시(春場試) 병과(丙科))에 급제(及第)하고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大司諫): 정삼품(正三品))을 지내셨다. 사림(士林)중에서도 가장 강직(剛直)하고 기개(氣槪)가 높은 정예(精銳)만이 사간원(司諫院)에 몸을 담을 수 있었다 지형(智亨)할아버지는 이러한 사간원(司諫院)의 장(長)이셨던 것이다 지형(智亨)할아버지 역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連累)되자 더러운 훈구세력(勳舊勢力)의 손을 빌릴 것 없이 자결(自決)하셨다. 호(號)는 국헌(菊軒)이시다.

 

8세(世) 미(美)할아버지와 그의 네 아들 오부자(五父子)는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등(等) 특히 맑고 고결(高潔)한 직책을 수행하고 계셨다. 조선조(朝鮮朝) 전기(前期) 사림(士林)집안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典型的)인 집안(輯安)이라 할 수 있다. 미(美)할아버지와 아들 사형제(四兄弟)분들은 성리학적(性理學的) 가치관(價値觀)의 관철(貫徹)을 위해서 진력(盡力)하시다, 사화(士禍)로 극형(極刑)까지 당(當)했는데 미(美)할아버지의 손자(孫子)들 또한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인형(仁亨)할아버지의 삼남(三男) 령(翎): 10세(世))은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정육품(正六品))으로 있을 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기묘사화(己卯士禍)는 1519년(年): 중종(中宗) 14) 11월(月))에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등 기성사류(旣成士類)인 훈구집권세력(勳舊執權勢力)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新進士類)인 사림파(士林派)를 모략(謀略)하여 숙청(肅淸)한 사건(事件)이다. 중종(中宗)은 연산군(燕山君)때에 거세(去勢)당했던 사림(士林)을 중용(重用)하고 신진사류(新進士類) 등을 육성(育成)하였다. 이때 10세(世) 령(翎)할아버지도 홍문관(弘文館)에서 활약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한 때에 스승인 조광조(趙光祖)와 그의 동지(同志) 사림(士林)들이 터무니없는 모략(謀略)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사자(四字)를 나뭇잎에 꿀로 글을 써서 벌레로 하여금 구멍을 내게 하고, 그것을 하늘의 계시(啓示)라고 했다 주초(走肖)는 조씨(趙氏)이며, 곧 조광조(趙光祖)를 가리킨다 조광조(趙光祖)가 대역모의(大逆謀議)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사화(士禍)에 휘말리자 령(翎)할아버지는 종질(從姪) 희민(希閔): 11세(世)) 이조정랑(吏曹正郞))과 함께 하루에 세 번씩이나 상소문(上疏文)을 올리다가 끝내는 모진 악형(惡刑)끝에 용문(龍門)에서 피살(被殺)되고 말았다. 아버지 인형(仁亨)이 부관참시(剖棺斬屍)된지 18년 만의 일이었다. 이리하여 령(翎)할아버지는 스승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기묘사화(己卯士禍)의 명현(名賢)이 되셨다. 희민(希閔)은 대사간(大司諫) 지형(智亨)할아버지의 손자이다.

 

인형(仁亨)할아버지의 큰아들 10세(世) 격(翮)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先生)의 여서(女婿)로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고 생원(生員)이 되었으나 불행(不幸)이도 34세(歲)에 조졸(早卒)하셨다. 둘째 아들 10세(世) 분(分羽 )은 진사(進士)로 장례원판사(掌隷院判事)가 되어 촉석루(矗石樓)에 차운시(次韻詩)가 있다.

 

의형(義亨)할아버지의 큰아들 10世 도(翿)는 학문(學問)에 열중하고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의 험한 길을 버리고 향리(鄕里)에서 학문(學問)과 자제교육(子弟敎育)에 정열(情熱)을 쏟았다. 이 당시(當時)의 조선조(朝鮮朝) 사회(社會)는 사화(士禍) 등(等), 세상(世上)이 혼란(混亂)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뜻있는 사림(士林)들 중에는 지방(地方)에서 은둔하는 분이 많았다. 이들을 “산림(山林)”(결코 숲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이라 하였다.

 

의형(義亨)할아버지의 삼남(三男)에 허(詡): 10세(世) 전경재(展敬齋))라는 분이 계셨다. 이 분 또한 형님(兄任) 도(翿)와 마찬가지로 고향(故鄕)에 은거(隱居)하며 학문(學問)과 인격도야(人格陶冶)에 열중(熱中)하였다 특히 효성(孝誠)이 돈독(敦篤)하고 우애(友愛)가 깊었다. 이 분은 1494년(年): 성종(成宗) 2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생원(生員)이 되었고, 특히 문장(文章)과 경서(經書)에 정통(精通)하셨다 학구파(學究派)에 성품(性品)이 고결(高潔)하여 험상(險像)궂은 세상(世上)에 뛰어들기를 거절했던 것이다.

 

의형(義亨)할아버지의 넷째 아들 익(翊): 10세(世) 월암공(月菴公)) 이분은 1501년(年): 연산군(燕山君 7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병조정랑(兵曹正郞),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종삼품(從三品)) 등(等)을 지내셨다. 역시 전형적(典型的)인 사림가문(士林家門)의 자제(子弟)로서 왕(王)에게 직간(直諫)하는 사간(司諫)의 직분(職分)을 맡았던 것이다.

 

8세(世) 미(美)할아버지로부터 9세(世) 네 분, 10세(世) 네 분, 삼대(三代)에 걸쳐서 아홉분의 행적(行蹟)을 살펴보았지만, 여기서 우리들은 함안이씨(咸安李氏) 가문(家門)의 체질(體質)과 성품(性品)의 원형(原型)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참으로 전형적(典型的)인 사림가문(士林家門)이며 선비 중의 선비를 우리들은 이 삼대(三代)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들은 여기서 잠깐 숨을 돌리고 다시 한번 시조(始祖) 상(尙)할아버지로 되돌아간다 상(尙)할아버지는 아들 두 분을 두셨다. 큰아들이 청(淸)할아버지고 둘째 아들이 원(源)할아버지였다. 둘째 원(源)할아버지의 아들이 교과서에 나오는 저 유명(有名)한 충렬공(忠烈公) 방실(芳實)할아버지다. 그래서 방실(芳實)할아버지의 자손(子孫)을 충렬공파(忠烈公派)라고 한다.

 

이 충열공파(忠烈公派) 중에 역사적(歷史的)인 인물(人物)이 또 한 분 배출된다. 그분이 9세(世)인 세응(世應)할아버지이다. 이 할아버지는 1501년(年): 연산군(燕山君) 7))에 문과(文科):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에 급제(及第)했다. 세응(世應)할아버지는 중종반정(中宗反正)때 큰 공(功)을 세워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이 되신 분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은 1506년(年): 연산군(燕山君) 12)) 9월에 폭군(暴君) 연산군(燕山君)을 폐(廢)하고 진성대군(晋城大君)을 왕(王)으로 세우는 사건이다. 이 사건(事件)의 주모자(主謀者)들이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등이다. 세응(世應)할아버지도 이 때 참여(參與)해서 큰 공(功)을 세웠던 것이다. 이 공(功)으로 해서 함안군(咸安君)에 봉(封)해졌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사간(司諫)으로 활약하실 때 연산(燕山), 중종(中宗) 양대(兩大)에 걸쳐서 저 악랄(惡辣)한 간신(奸臣) 유자광(柳子光)을 탄핵(彈劾)해서 실각시키는 데 큰 역할(役割)을 했던 것이다. 그 뒤 강원(江原), 충청(忠淸), 평안도(平安道), 관찰사(觀察使)와 이조(吏曹), 예조(禮曹)에서 참판(參判)을 지내셨다. 돌아가신 후(後)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으로 추증(追贈)되셨다.

 

이 세응(世應)할아버지에게는 아들 세(世) 분이 계셨는데 큰아들이 여주목사(驪州(牧使) 진(震): 10세(世) 오위장(世五衛將)), 둘째가 대사간(大司諫) 림(霖), 셋째가 충훈부경력(忠勳府經歷))제(霽), 이렇게 삼형제(三兄弟)분이다 이 삼형제(三兄弟)분 역시 기개(氣槪)가 높고 정의감(正義感)이 강(强)해서 결국 을사사화(乙巳士禍)에 희생되고 만다 그리하여 세 분이 모두 을사사화(乙巳士禍)의 명현(名賢)들이다.

 

1545년(年): 인종(仁宗) 1))에 인종(仁宗)의 외숙(外叔) 대윤(大尹) 윤임(尹任)이 득세(得勢)하여 사림(士林)의 명사(名士)를 등용(登用)할 때 진(震)할아버지는 군기사정(軍器寺正)으로 림(霖)할아버지는 병조참의(兵曹參議)로 기용(起用) 되었으나 인종(仁宗)이 겨우 재위(在位) 8개월(個月) 만에 승하(昇遐)하고 12세(世)의 명종(明宗)이 즉위(卽位)하니 외숙(外叔)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득세(得勢)하여 전일(前日)의 정적(政敵) 윤임(尹任) 일파(一派)를 제거(除去)하기 위하여 반역음모죄(叛逆陰謀罪)로 몰아 무고(誣告)하여 귀양 보내고 죽일 때에 진(震)은 태안(泰安)으로 유배(流配)되었다가 21년(年) 만에 해배(解配)되어 여주목사(驪州牧使) 오위장(五衛將)까지 되었으나 림(霖)은 의주(義州)에 장배(杖配)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여기서 우리들은 앞에서 이야기한 9世 인형(仁亨) 대사헌(大司憲)할아버지와 그 아들 10世령(翎)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할아버지 그리고 령(翎)할아버지의 종질(從姪) 11세(世) 희민(希閔) 이조정랑(吏曹正郞)할아버지를 다시 머리에 떠올리자 이 분들 또한 갑자사화(甲子士禍)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희생된 분들이시다. 그렇다면 인형(仁亨)할아버지, 령(翎)할아버지, 희민(希閔)할아버지와 세응(世應)할아버지 및 그 세아들들 과의 관계(關係)는 어떻게 되는가? 인형(仁亨)할아버지 쪽은 시조(始祖) 상(尙)할아버지, 큰아들 청(淸)할아버지, 삼세(三世) 홍(弘)할아버지에서 비롯됐고, 세응(世應)할아버지 쪽은 시조(始祖) 상(尙)할아버지, 둘째 아들 원(源)할아버지, 삼세(三世) 방실(芳實)할아버지께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렇게 비롯된 줄기가 다르다 손 치더라도 함안이씨(咸安李氏)의 기질(氣質)은 선비와 사림(士林)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함안이씨(咸安李氏) 가문(家門)은 항상 선비만 배출(輩出)한 것은 아니었다.

 

13세(世) 달(達: 1561년(年) 명종(明宗)16)∼1618년(年) 광해군(光海君)10) 자(字) 명숙(明叔), 호(號) 운포(雲圃))은 12세(世) 세렴(世廉)할아버지의 차남(次男)이시다. 우리는 이분을 흔히 운포공(雲圃公)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운포공(雲圃公)이 성장(成長)하고 활동(活動)하던 시기(時期)는 주로 선조(宣祖)14: 1567∼1608))시대(時代)였다. 이 시기(時期)의 특색은 심의겸(沈義謙), 김효원(金孝元) 등이 동서당쟁(東西黨爭)을 일으키고 임꺽정(임거정(林巨正)) 등이 난(亂)을 일으키며, 나라는 점점 혼란(混亂)에 빠져 들어갔다. 북방(北方)의 호적(胡賊)과 남(南)쪽의 왜구(倭寇)가 날뛰고 하는 판국에 정여립(鄭汝立) 따위가 모반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時期)에는 이지함(李之菡)이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지었으며 이황(李滉): 퇴계(退溪))선생과 이이(李珥): 율곡(栗谷))선생과 같은 명현(名賢)이 계셨던 시대(時代)이기도 하다.

 

아무튼 운포공(雲圃公)할아버지가 32세(歲) 때인 1592년(年): 선조(宣祖)25)) 4월(月)에 일본(日本)은 대군(大軍) 21만(萬)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운포공(雲圃公)할아버지는 고성(固城)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사천(泗川), 진해(鎭海), 창원(昌原), 웅천(熊川)등지에서 맹활약을 하다가 그해 10월(月) 6일(日) 진주성대첩(晋州城大捷)에서 큰 공(功)을 세운다 이것을 계기로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 종삼품(從三品))에서 점점 급(級)이 높아졌으며 드디어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이 되셨다.

 

그 후 운포공(雲圃公)할아버지는 당포(唐浦): 경남(慶南) 통영시(統營市) 산양읍(山陽邑) 삼덕리(三德里) 앞바다)) 해전(海戰)에서 왜군(倭軍)을 대파(大破)하고 큰 전승(戰勝)을 거둔다. 이 공(功)으로 해서 선조(宣祖)께서 상가교서(賞加敎書): 전공(戰功)의 노고(勞苦)를 칭찬(稱讚)하는 친서(親書))를 내리시고 또한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라는 기록화(記錄畵)를 내리시기도 했다. 그후 함경남도(咸鏡南道) 병마우후(兵馬虞侯) 선전관(宣傳官), 삼도통제우후(三道統制虞侯),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이품(從二品)),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내시고 돌아가신 후(後)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정이품(正二品))로 추증(追贈)되셨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年))과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년(年)) 동안에 민족애(民族愛)를 발휘하고 전공(戰功)을 세운(世運) 함안이씨(咸安李氏)는 비단 운포공(雲圃公) 한 분에 그치지 않았다.

 

오위(五衛): 군대조직(軍隊組織))의 사과(司果): 정육품(正六品))로 계시던 13세(世) 장(檣)할아버지는 백부(伯父) 우춘(遇春): 돈영부첨정(敦寧府僉正)), 중부(仲父) 응춘(應春): 생원(生員)), 계부(季父) 득춘(得春): 수문장(守門將)), 아버지 성춘(成春): 제용감판관(濟用監判官))과 함께 진주(晋州)서 의병(義兵)을 이끌고 일어나 진양(晋陽) 대방산성(大防山城)을 지키는데 큰 공(功)을 세웠다 아버지와 그 형제(兄弟) 네 분은 다 같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등(二等)에 올랐고 장(檣) 자신(自身)은 일등(一等)을 받았다.

 

11세(世) 석형(碩亨)할아버지는 흡곡현령(歙谷縣令)으로 있을 때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아들 민(旻), 승(昇), 안(晏) 삼형제(三兄弟)와 더불어 사부자(四父子)가 격전(激戰)을 벌이다가 민(旻), 승(昇)과 자기(自己) 삼부자(三父子)가 전사(戰死)하고 말았다 민(旻)의 처(妻):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남편의 죽음을 목전(目前)에서 보고 그 자리에서 자결(自決)하고 말았다. 승(昇)의 처(妻): 진양강씨(晋陽姜氏))는 풍덕(豊德) 친정(親庭)에서 남편(男便)의 전사(戰死) 소식(消息)을 듣고 바다에 투신(投身)하여 열여(烈女)의 정절(貞節)을 지켰다. 그리하여 양대(兩代)에 걸쳐 삼정려(三旌閭)가 세워지고 충효열(忠孝烈)의 의(義)를 한 집에서 세웠다.

 

12세(世) 강(日工)할아버지는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금산(錦山) 전투(戰鬪)에서 격전(激戰)을 치르면서 적(敵)의 진로(進路)를 차단(遮斷)하고, 끝내는 칠백의총(七百義塚)에 묻히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추증(追贈)되었다. 그리고 그의 공(功)을 기리는 정려(旌閭): 충신(忠臣)·효자(孝子)·열녀(烈女)등을 기리기 위해서 그가 살던 마을 어귀에 세우는 붉은 문(門))가 세워졌다.

 

12세(世) 신천재(新川齋) 응성(應星)할아버지는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와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큰 공(功)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등(二等), 고원군수(高原郡守)를 지내고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추증(追贈)되었다.

 

12세(世) 송암공(松巖公) 복(福)할아버지는 고성(固城)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고 연화산(蓮華山)을 근거(根據)로 게릴라 전(戰)을 수행(遂行)하여 눈부신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등(二等)을 받았고, 돌아가신 후(後)에는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추증(追贈) 되었다.

 

한편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경상도수영우후(慶尙道水營虞候) 12세(世) 엽(曄)할아버지는은 여러번 큰 공(功)을 세웠으나 끝내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일본(日本)의 관백(關伯) 풍신수길(豊臣秀吉)에게 까지 끌려 갔다. 그는 굴(屈)하지 않고 왜(倭)의 비리(非理)를 추궁(追窮)하다 끝내 할복(割腹) 자결(自決)하였다. 이리하여 엽(曄)의 공적(功績)과 행적(行蹟)은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와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실려 있다.

 

멀리 고려조(高麗朝)에서는 충렬공(忠烈公) 방실(芳實)할아버지가 북(北)쪽의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쳤고,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는 운포공(雲圃公)을 비롯한 여러 어른들이 왜적(倭賊)을 물리치는데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함안이씨(咸安李氏)의 조상(祖上)들은 외적(外賊)의 침입(侵入)을 보고서는 그냥 있지를 못했다 민족(民族)과 백성(百姓)을 사랑하고 나라를 지키기를 자기(自己)에 우선했던 것이다.

 

 

3. 선비정신(精神)과 기개(氣槪)의 집안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등 일본(日本)과의 전쟁(戰爭)이 끝나는 것은 1598년(年): 선조(宣祖)31)) 지금으로 부터 약 사백년전(四百年前)의 일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以後) 사백년(四百年) 동안에도 함안이씨(咸安李氏) 가문(家門)은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훌륭한 인물과 존경(尊敬)받는 가문(家門)을 영위(營爲)해 왔다. 특히 근세(近世)의 일제(日帝) 식민지(植民地)하에서도 민족애(民族愛)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독립운동(獨立運動)에 가담(加擔)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들은 함안이씨(咸安李氏) 가문(家門)이 선비정신(精神)과 기개(氣槪)로 특정 지워 진다는 사실(事實)을 알 수 있게 된다.

 

8세(世) 창강공(滄江公) 미(美)할아버지와 그 아들 사형제(四兄弟)분 아들들의 행적(行蹟)에서, 그리고 세응(世應)할아버지와 그 아들 삼형제(三兄弟)분으로부터 우리들은 참으로 고매(高邁)한 인품(人品)과 칼날 같은 절의(節義)를 볼 수 있었고, 3세(世) 충렬공(世忠烈公)할아버지, 13세(世) 운포공(雲圃公)할아버지 그리고 그 외의 많은 할아버지들로부터 민족애(民族愛)와 정의감(正義感)을 불사른 흔적(痕迹)을 엿볼 수 있었다 참으로 함안이씨(咸安李氏) 가문(家門)은 전형적(典型的)인 선비 집안이요 기개(氣槪)로 가득 찬 집안이다.